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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영자 신문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1면은 총리가 해외 각국 정상과 교류하는 사진들로 도배된다. 요즘처럼 코로나19 창궐 같은 ‘준전시(準戰時)’만 아니라면, 거의 늘 그렇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베트남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대외관계에 신경을 쓰는 국가다. 외교관계를 수립한 국가가 190개국에 달한다. 전 세계 국가(UN 가입 기준 195개국)와 교류하고 있는 셈이다. 대외 개방성 측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국(191개국, 2020년 2월 기준)과 비슷한 수준이다.

베트남에 대해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몇 가지 오해와 편견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베트남의 개방성에 관한 것이다. 북한과 한 지붕을 이고 살다보니 ‘사회주의=폐쇄’, ‘자본주의=개방’이란 등식이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는 탓이다.

베트남은 2007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글로벌 시장경제 시스템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현재 발효 중인 FTA(자유무역협정)만 11개에 달한다. 올해는 EVFTA가 목록에 새로 추가될 예정이다. EU(유럽연합) 28개국 시장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면허를 따는 것이다. FTA 강국인 한국의 16개에 버금가는 숫자다.

베트남의 대외 개방성은 실용주의와 민족주의가 절묘하게 결합돼 만들어졌다. 원류는 베트남의 국부(國父)인 호치민이다. 인민의 부강(富强)을 통한 국가의 이익이 최고의 가치이며, 이를 위해선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선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는 게 좋겠다. “베트남은 식민지 시절에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프랑스를 상대로 다수의 인명을 희생시키면서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프랑스의 지배를 채 벗어나기 전 1945년 8월 혁명을 기회로 정권을 잡은 호치민은 프랑스의 자본이 베트남에 유입되어 베트남의 자원을 이용하고 국가건설에 이바지 해줄 것을 수차례 요청하였다. 또한 비록 호치민이 서거한 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수백만 명의 인명이 살상된 미국과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베트남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매진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호치민의 실용주의에 의해 설명되어지고 있다. 그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명분 때문에 장기적인 국가의 이익을 놓쳐 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이윤범, 동남아연구, 2013)

오늘날 프랑스는 유럽 내 베트남의 최대 우방국이다. 일본 식민지배 시절을 겪은 한국으로선 베트남 사람들이 프랑스를 대하는 감정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최애 관광지로 꼽히는 다낭의 바나힐만 해도 프랑스가 옛 식민 시절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베트남 중부 해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원에 그들만의 여름 휴양지를 짓기 위해 프랑스인들은 수많은 베트남 현지인들을 희생시켰다. 지금 그곳은 ‘프랑스 마을’로 불리며 전 세계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베트남 중부의 바나힐을 비롯해 북부의 사파, 남부의 달랏 등 베트남의 ‘달러 박스’로 부상하고 있는 곳들은 모두 프랑스인들이 피식민지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건설한 도시다.

북중부에 있는 응에안(NghêAn)성에 갔을 때에도 비슷한 혼란스러움을 느낀 적이 있다. 성도인 빈(Vinh)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호치민의 생가(生家)가 있다고 해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호치민이 나고 자란 외가 마을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곳이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던 날이어서 방문객은 얼마 없었다. 우리 일행에 앞서 유럽에서 온 걸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열심히 통역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프랑스 여성이었다.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통역이 유적지 직원이라는 것이다. 베트남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장소에 프랑스인들이 방문한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들을 위한 무료 불어 통역 서비스가 있다는 건 충격에 가까웠다. 마치 김구 선생의 생가에 일본인들이 자주 오고, 그들을 위한 일본어 통역 서비스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쉽게도 호찌민 생가에 한국어 통역은 없었다. (비수기였던 그날 한국어 통역이 휴무였을 가능성은 있다)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도 불과 30여 년 사이에 상전벽해처럼 변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베트남 사람들은 American War라고 부른다)’이 끝나자 베트남 리더들은 재건의 일환으로 자국 유학생들을 미국으로 보냈다. 1986년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선언한 도이머이 정책을 실시할 때에도 베트남 정부는 ‘시장경제 교사’로 미국의 경제학자들을 초빙했다.

2019년 교역액을 기준으로 미국은 베트남 제1의 수출 시장이다. 코로나19 사태로 미중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인들은 앞으로 더 ‘메이드 인 베트남’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베트남 사람들의 대미 감정도 매우 우호적이다.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성조기로 치장한 오토바이크를 타고 하노이 도심을 누빈다. 하노이에서 피부과를 운영하고 있는 병원장 A씨는 주 고객층인 베트남 부자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병원 내부에 베트남과 미국 국기를 나란히 걸었다. ‘미국=최고급’이란 베트남 사람들의 인식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명절이면 베트남 부유층은 미국산 체리가 담긴 과일상자를 선물로 주고받는다.

정부는 물론이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베트남이 ‘한국의 텃밭’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에 투자한 국가 중 한국이 1위라는 통계가 이 같은 ‘착각’에 기름을 붓고 있다. 1988년부터 2020년 3월까지 한국의 대(對)베트남 투자액은 683억 달러다. 전체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18%다. 1위인 건 분명하지만, 2위인 일본(595억 달러)과 3위 싱가포르(539억 달러)와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

한국이 베트남에 유독 애정을 쏟는 배경엔 일본과의 경쟁 심리가 깔려 있다.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각국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개발은행(ADB)의 본부는 필리핀 마닐라에 있다. 그간의 성적을 고려하면, 일본의 베트남 투자는 ‘평균 이하’라고 할 수 있다. 1992년 미국이 대베트남 경제제재를 해제하기 전까지 일본은 베트남 투자를 망설였다. 그 빈틈을 대우, 포스코, 삼성, LG 같은 우리 기업들이 공략했다. 그 덕분에 베트남과 한국은 순망치한의 관계로 발전했다.

하지만 ‘소프트 파워’라는 측면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베트남에 더 영향력이 있는 지는 한번 되짚어 봐야할 문제다. 이와 관련해 베트남의 고위 퇴직 관료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베트남의 시장경제 전환기에 관여했던 인물이다. 그가 들려준 일화는 베트남이 생각하는 일본의 위상을 보여준다.

1960년대 중반 미국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당시 서기장이던 레주안( Duẩn)은 전후 베트남 재건을 위한 전략을 연구할 것을 지시했다. 이때 ‘롤 모델’로 연구 대상이 된 곳이 일본이다. 베트남 관료와 학자들은 일본이 명치유신을 통해 서양에 맞서 부국강병을 이룬 경험을 집중 연구했다고 한다.

도이머이 개혁 때 미국인들이 IMF(국제통화기금) 파견원으로 베트남 정부에 자문했다면, 수많은 일본인들은 ADB 연구원 자격으로 베트남에 입성했다. 일본은 총리에 직보할 수 있는 베트남 경제 자문을 두기도 했는데, 짠번토(Trần Văn Thọ) 와세다대 교수가 주인공이다. 그는 베트남에 ODA 자금을 지원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의 ODA 자금이 공항, 다리, 도로 등 베트남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인프라’ 건설에 집중 투자된 건 오랫동안 베트남을 연구해 온 전문가들의 의견이 반영됐을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의 인식 속에 일본은 ‘따라하고 싶지만 따라갈 수 없는 나라’다. 베트남 부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국가 브랜드는 일본과 독일이다. 베트남 여성들이 돈을 벌면 가장 하고 싶거나 사고 싶은 걸 꼽으라는 설문이 있었는데 1위는 코수술이고 2위는 애플 아이폰이라는 말도 있다.

베트남 정부가 한국의 산업화 모델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는 건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해서지 한국을 존경하거나 좋아해서는 아니다. 1960년대까지 남한은 북한보다 못 사는 나라였고, 베트남과 처지가 비슷했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관념을 분석해본다면, ‘질투’가 상단을 차지할 게 분명하다. 게다가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인에 대해 ‘여자를 때리는 남자의 나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 리더들은 정치체제와 관련해서도 일본을 훨씬 선호한다. 아시아 국가의 산업화와 관련해 베트남 리더들이 가장 추앙하는 인물은 이케다 하야토 일본 수상과 박정희 대통령이다. 이케다 수상은 전후 일본의 재건을 이끈 정치인이다. 필자와 인터뷰를 했던 전직 관료는 두 명의 인물을 거론하며 한국과 일본을 이렇게 평가했다. “일본은 전국에 이케다 수상 동상을 흔히 볼 수 있지만,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을 더 이상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추론이긴 하지만, 자유와 민주주의 나라 한국은 베트남 리더들에겐 ‘불온한 사상’의 나라로 인식될 공산이 크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한국과 베트남 간 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에선 일본과 베트남을 한통속으로 묶어 ‘일베’라는 신조어까지 나온 모양이다. ‘한국의 텃밭’이라고 여겼던 베트남이 한국인 입국을 신속히 제한하고, 일본에 진단키트 구원을 요청하는 모습에 일종의 서운함 혹은 배신감 같은 걸 느낀 것 같다. 호텔이나 골프장에 ‘감염국에서 온 모든 외국인 금지’라는 푯말이 걸려도 한국에선 이를 ‘한국인 금지’로 읽었다.

냉정을 찾자는 차원에서 거꾸로 이런 질문을 해봤으면 싶다. ‘과연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을 좋아했었나?’, ‘베트남은 외교관계를 맺은 190개 국가들 중 한국에 가장 고마워하나?’ 이런 류의 질문 말이다. 어쩌면 ‘박항서(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 감독) 효과’가 그간의 불편한 진실을 가렸던 것인 지도 모른다.

다행히 역전의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빌게이츠가 칭찬할 정도로 한국은 ‘코로나19 방역 모범국’으로 주목받고 있다. 선진 의료 시스템, 성숙한 시민 의식 등이 한국이라는 국가 브랜드 상승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 기업인은 “요즘 해외에 있는 바이어들이 한국에 관심이 엄청 많아졌다”고 전했다. 베트남이 ‘그림의 떡’이라고 부러워했던 일본은 침몰 직전의 거함일 뿐이다. 세계 초일류로 자부했던 미국마저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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